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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 최씨 고택

올해는 와이프 출산으로 인해 아직 가까운 곳 다녀보지 못했지만 1월에 태어난 아들녀석을 보니 작년 이맘때 쯤 장인어른과 같이 간 경주 최씨 고택이 생각납니다.
제가 경주 최씨인지라 꼭 우리 아들이 크면 같이 가서 거닐어 보고 싶은 고택입니다.
경주 최씨 집안에 태어난 우리아들을 생각하며 다시 사진을 뒤적여 봅니다...
아들아~
넌 자랑스런 시조 최치원 35대손 사성공파란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正確(정확)한 建立年代(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 約(약) 200年前(년전)에 建立(건립)된 것이라 하며 口形(구형)의 松木(송목)골 기와집이다.
元來(원래)는 99間(간)이었다고 하여 各(각) 建物(건물)마다 建立年代(건립연대)가 다르다. 約(약) 2,000坪(평)의 垈地(대지)에 솟을大門(대문)에, 고방채, 사랑채, 내실, 祠當(사당) 等(등)이 있으며 특히 內室(내실)에는 원기둥 3個(개)를 세웠다.

文獻(문헌) : 文化遺蹟總覽 (문화유적총람 慶北編(경북편) : p.67)

1970년 11월 火災(화재)로 사랑채는 燒失(소실)되고 其外(기외) 建物(건물)은 잘 保存(보존)되어 있다.


* 연혁(유래)
이 가옥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南川)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一'자 모양이다.
사당(祠堂)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 가옥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南川)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一'자 모양이다.
사당(祠堂)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